바람이 꽤나 선선한 여름날의 어느 아침, 친숙한 얼굴의 한 남자가 약간의 과장을 보태 바퀴가 자동차 바퀴만한 크롬 자전거에 오른다. 캘리포니아 샌타모니카에서 베니스까지 4km 정도 되는 거리를 달리려는 아널드이다.
이 새벽 라이딩에는 매니저 다니엘 케첼Daniel Ketchell, 아널드의 오랜 벗 디터 로터Dieter Rauter, 그리고 올가을 개봉 예정 영화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Terminator: Dark Fate>에 함께 출연하는 가브리엘 루나Gabriel Luna가 자리했다.
시원한 새벽 바람을 가르며 나란히 달리는 것이 계획이었다. 하지만 3분도 안되어 계획 전면 수정이다. 이제 탄력이 붙어 페달 좀 밟으려는데, 어디 대회라도 출전한 양 미친 듯 밟아 대는 아널드를 도저히 따라갈 재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응급환자 이송으로 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는 앰뷸런스를 본 적 있나. 아널드의 라이딩이 딱 그랬다. 빨간불도 정지 신호도 그를 멈출 수 없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헬멧도 쓰지 않고 무지막지하게 달리는 그의 옆에 경찰차가 따라붙는가 싶었는데, 아널드의 자전거가 핸들을 급하게 틀어 어느 골목으로 휙 들어가버렸다. 그러고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지난 7월 72세가 된 이 남자. 가만 생각해보면 페달을 그렇게 열심히 밟고 있지도 않았다. 단지 속도를 줄이지 않았을 뿐인데 말이다.
35년 만에 새롭게 탄생하는 터미네이터
오랫동안 전 세계 팬들의 뜨거운 관심과 사랑을 받아온 터미네이터 시리즈가 올겨울에 35년째 생일을 맞는다. 영화 <코난: 더 바바리안Conan: The Barbarian>에서 복수에 불타는 용맹한 전사의 모습을 보여준 아널드는 이 영화의 성공으로 일약 세계적 스타가 되었다.
그러나 시대의 아이콘으로 오늘날의 아널드가 있게 된 건 제임스 카메론James Cameron 감독의 두 번째 영화였던 <터미네이터> 덕분이었다. 싸구려의 괴상하고 무자비한 그런 영화였다. 피해망상에 찌든 그런 공상과학 스토리, 핵 위협을 비롯해 인류의 종말을 가져올 인공지능AI 시대를 그린 그런 스토리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아널드의 감정 없는 연기를 만들어 낸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감정 없던 연기가 대중의 마음을 잡았고, 오늘날의 아널드를 있게 했다. 이 영화 덕분에 전설적인 아널드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아널드의 배우로서의 커리어에서 굉장히 중요한 영화라 할 수 있다. 영화 속 캐릭터가 아널드의 미래를 보여준 것 같다.
터미네이터 T-800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갑자기 어디선가 등장한다. 그러고는 그리피스 파크 천문대 옥상에서 할리우드를 바라본다. 터질 듯한 허벅지로, 자신을 방해하는 것은 뭐든지 다 없애버리겠다는 듯 말이다.
20년 후 이 터미네이터는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되었다. 국민소환투표에서 민주당 그레이 데이비스Gray Davis, 개리 콜먼Gary Coleman, 아리아나 허핑턴Arianna Huffington, 래리 플린트Larry Flynt를 모두 물리쳤다. 터미네이터와 주지사인 거버너Governor를 합쳐 사람들은 그를 거버네이터Governator라고 불렀다. 중요한 것은 그가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되었다는 점이다.
영화배우가, 그것도 정치 경험이 전무한 사람이 주지사가 된 것은 미국 역사 그 어디를 찾아봐도 없을 정도로 전무후무한 일이다. 오리지널 터미네이터는 인류를 말살시키라는 명령을 받고 미래에서 온 무자비한 살인 기계였다.
해를 거듭하며 문화적 아이콘으로 자리잡아가는 아널드의 모습과 매 시즌을 거듭하며 진화하는 터미네이터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많이 닮았다. 1991년 개봉된 <터미네이터2: 심판의 날Terminator2: Judgment Day>의 T-800은 기존에 비해 좀더 부드럽고 착해졌다.
감정 따위는 전혀 없었던 전편의 모습과는 달리 <트윈스Twins>나 <유치원에 간 사나이Kindergarten Cop>에서 나온 좀더 사람다운 기능도 장착했다. 희끗희끗한 수염도 이번 영화에서는 그대로 담겼다. 커다란 자동차를 몰고 ‘칼Carl’에게 대답도 한다.
<터미네이터2> 이후 다시 돌아온 사라 코너Sarah Connor 역할의 린다 해밀턴Linda Hamilton과 함께 인류에 종말을 가져오려는 카메론 감독의 깜찍한 계획을 막을 것도 같다. 새롭게 개봉하는 영화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에서 T-800은 머리가 반백이 된 채, 훨씬 강력하고 빠르고 야비한 모습으로 마지막 쇼를 즐기는 악당으로 등장한다.
가브리엘 루나는 최신형 터미네이터인 Rev-9을 연기한다. 외골격은 금속으로, 내골격은 액체 금속으로 이루어져 몸을 두 개로 분리시킬 수 있다. 한마디로 기존 터미네이터보다 능력면에서 엄청나게 진화한 형태이다.
“영화를 보다 보면 터미네이터, T-800이 불쌍하게 느껴지는 순간도 있을 거예요. 차라리 그냥 망가져서 죽었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이기길 바라는 그런 순간이요.” 슈워제네거의 말이다.
밀러 감독은 슈워제네거가 영화에 출연하겠다고 결심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그의 나이에 대해서 고민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디지털 아널드를 원한 게 아니었어요. 한때 영웅이라 불리던 사람이 나이를 먹었을 때, 그 리얼리티를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예전부터 영화 <집행자 루스터Rooster Cogburn>나 <진정한 용기True Grit>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허점이 있는, 완벽하지 않은 영웅, 저에게는 젊고 완벽한 그 어떤 누구보다 더 완벽하게 느껴져요. 그런데 아널드를 보세요. 정말 멋지잖아요.”
아널드는 보통 저녁에 집에서 운동을 하는데, 베니스에 올 때면 짐에서 아침 운동을 한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운동할 때 나오는 그 에너지가 좋기 때문이다. 그냥 평범한 목요일 아침, 동네 체육관 친구에게 아침 인사를 건네는 인심 좋고 몸도 좋은 체육관 아저씨인 양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다.
그러면 그 사람들도 그냥 아무렇지 않게 받아친다. 체육관에 있는 누구든 슈워제네거와의 이런 간단하지만 아주 특별하고도 선물 같은 순간을 경험한다. 아널드의 대역배우인 라우터는 로라와 함께 케첼의 데드리프트 최고 기록 도전을 관람한다.
슈워제네거는 뒤쪽에서 풀오버 머신에 조용히 앉는다. 2012년 회전근개 파열 수술을 받은 이후로 프리 웨이트 대신 머신 운동에 집중한다. 슈워제네거는 고관절과 무릎 수술 경험도 있다. 그리고 작년에는 심장의 폐동맥판막 교체 수술도 받았다.
그래서 머신을 옮겨 다니는 모습이 예전 같지 않다. 동작이 조금 굼뜨다. 터미네이터의 T-800이 겉모습은 사람인 것처럼 아널드도 살아 있는 세포로 만들어진 사람이다. 그리고 세포들은 결국 퇴화하지 않는가. 포도알 같은 이두근 옆으로 쭈글쭈글한 피부도 보인다.
그런 그가 풀오버를 시작한다면? 순식간에 나이, 세월이 무색해진다. 도대체 이 엄청난 파워와 정력이 갑자기 어디서 나오는 건지 마치 이 순간을 위해 기다렸던 사람 같다. 한 시간 동안 집중 운동에 골프까지 끝내고 아널드가 자전거에 오른다. 우리도 자전거에 올랐다.
이번에는 절대 놓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지만 2분도 채 되지 않아 우리 둘 사이에 자동차 몇 대는 들어오고도 남을 만큼 거리가 벌어졌다. 이 거리 차 덕분에 출근하는 사람들, 딱딱한 안전모 뒤집어쓴 현장 인부들, 노숙자들의 ‘나 방금 아널드 슈워제네거 본 것 같은데?’ 하는 생생한 반응을 뒤따라가며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신호등에 빨간불이 켜졌다. 그러나 아까도 그랬듯 아널드는 이미 떠나버린 지 오래다. 루나가 조용히 그런다. “승부욕으로는 아널드 따라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예요.” “나 승부욕 같은 거 별로 없지 않아?” 아널드의 말에 옆에 있던 모든 사람이 웃는다.
이번 논쟁은 한 몇 시간은 그냥 갈 것 같다. “아널드와 절대 체스 두지 마세요.” 다른 쪽 테이블에 앉아 있던 라우터가 말한다. “여섯 게임 연달아 이기다가 마지막 한 게임을 지잖아요? 그럼 저 사람은 자기가 이겼다고 생각해요.” 그러고는 목소리를 낮게 깔아 아널드를 흉내낸다.
“넌 루저, 난 위너.” 가만히 듣고 있던 아널드. “마지막 게임을 지면, 다 진 거예요. 그러니 네가 루저인 거지요.” 참고로 지금까지 체스 전적은 193대 145란다. “제가 잘하는 게 아니라 저 친구가 정말 못해요. 공은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야지요.” 웨이터가 작은 빵들이 담긴 접시를 내온다.
접시를 본 아널드는 진짜 너무하다며 짧게 내뱉고는 바로 팽 오 쇼콜라 한조각을 집는다. 건강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단다. 물질적 건강, 정신적 건강 그리고 신체적 건강까지 신경써야 할 부분이 많다. 메뉴를 훑어보면서 “이건 정신 건강을 위한 거예요”라고 하더니 빵 조각을 입에 털어 넣는다.
“승부욕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저는 제 주변 사람들이 더 성장할 수 있도록 돕고 싶었어요. 제게 가장 큰 동기부여가 되었던 건 주변 사람들이었거든요. 영화를 찍을 때도 장면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고, 감정을 나누면서 서로를 격려하고 자극을 주고 그런답니다.”
적과 적의 첫 만남
아널드와 루나는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 촬영을 하며 처음 만났다. 슈워제네거와 린다 해밀턴의 귀환 외에도 이 영화에는 <홀트 앤 캐치 파이어Halt and Catch Fire>의 맥켄지 데이비스Mackenzie Davis가 반 인간, 반 로봇 역할로, 나탈리아 레이즈Natalia Reyes가 새로운 인류의 미래로 등장한다.
미국 드라마 <쉴드 S.H.I.E.D>의 로비 레이즈Robbie Reyes 역할로 큰 인기를 끌었던 가브리엘 루나에 대한 기대 또한 남다르다. 아널드와의 첫 만남이 어땠냐는 질문에 루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보자마자 압도된 것 같아요. 정말 전설적인 인물이잖아요.
하지만 아널드는 ‘나는 너랑은 전혀 다른 사람이야’ 하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대화할 때마다 사람들의 눈을 빤히 쳐다보는데, 그러면서 쿵쾅거리는 마음이 조금씩 진정되더라고요.” 오스틴 출생의 루나는 TV와 VCR이 설치된 카트가 체육관에 들어오던 날을 기억한다.
TV에서는 대통령의 체력 테스트용으로 쓰겠다며 만든 아널드의 비디오가 재생되고 있었다. 루나는 형과 함께 <터미네이터 1, 2> 그리고 <트루 라이즈True Lies> 같은 슈워제네거의 다른 클래식 영화를 보고 자랐다. 36세의 루나는 아널드의 72번째 생일 파티에 초대받았다.
그에게는 정말이지 꿈같은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어려서부터 동경해 온 사람의 생일에 초대받은 것만으로도 입이 떡 벌어지는데, 그냥 생일 파티도 아니고 7월의 옥토버페스트Oktoberfest 테마로 동물들도 많이 있는 파티 였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파티를 즐겼을지는 보지 않고도 알 만했다.
게다가 악어, 여우원숭이, 독수리까지 등장하는 파티라니. 특히 독일 전통의상 레더호젠을 입고 작은 모자를 쓴 슈워제네거라니 생각만으로도 얼마나 신나는 파티였는지 짐작할 만하다. 아직 잘 모르겠다는 루나와 달리 밀러 감독은 루나만큼 이번 터미네이터 스토리를 잘 전달할 수 있는 사람도 없을 거라고 한다.
“현재 인공지능 개발 정도를 감안했을 때 인간적 면이 있는 터미네이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가브리엘을 떠올렸죠. 아주 매력적이고 선한 미소로 사람들의 마음을 녹이다가도 갑자기 확 돌변해서는 전에 없던 연쇄 살인범의 느낌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은 가브리엘밖에 없었거든요.”
루나에게 세트장에서 아널드를 처음 만나는 날 따로 무슨 준비 같은 걸 했는지 물어봤다. 첫 번째 오디션 기회를 얻자마자 바로 트레이닝에 돌입했단다. “몸을 만들어야 했어요. 위스키도 자주 마셨고, 담배도 피웠고, 이 역할을 맡았을 때 절대 하지 않을 것들을 즐기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언젠가 이 남자 앞에 설 날이 올 거라는 걸 예상했어요.” 아널드를 슬쩍 가리키는 그다.
“그리고 저를 만났을 때 그냥 다른 연기자가 아니라 정말 무시무시한 적으로 느껴지도록 만들자는 것이 저의 목표였지요. ‘이 정도면 그냥 뭐 엄지손가락 하나로도 처리하겠다’는 생각 같은 건 아예 안 들도록 말이에요.” 루나가 아널드 슈워제네거 영화를 보고 자랐다는 말을 하기 전까지는 아널드는 그의 친구이자 동료 배우인 루나가 본인 나이의 딱 절반이라는 걸 몰랐던 모양이다.
“몇 년도에 태어났어?” “1982년이요.” 루나가 대답한다. “82년이라…” 추억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지 목소리가 아주 부드러워진다. “82년에 코난 영화가 나왔었지.” 1982년에 아널드는 랄프 묄러Ralf Moeller를 만났고 그와 함께 독일로 갔다.
무대에 올라 사람들에게 코난을 상영하던 그해에 루나가 태어났다. 루나가 첫 번째 숨을 내쉬기도 전에 이미 영화계에서 엄청난 커리어를 쌓았던 것이다. 그랬던 그들이 이번 영화에서 만났다. 그것도 서로를 죽이려는 적으로 만났다. 루나의 말에 따르면 이 대배우님이 터미네이터 연기에 관해서는 그렇게 많은 팁을 주지는 않았단다.
“묻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체육관에서 만났을 때 딱 한번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그냥 본인 스타일대로 하면 된다고 하더군요. 그러지 말고 좀더 가르쳐달라고 더 파고들었더니 힘들이지 않고 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무기를 쓸 때는 고관절부터 힘을 끌어올려 쏴야 하고, 시선은 총이 아니라 무조건 타깃을 향해야 한다. 눈도 깜빡이지 말고 그냥 자동으로 발포하라’는 거지요.” 듣고 있던 아널드가 한 마디 보탠다.
“눈 안 깜빡이는 거 사실 굉장히 어려워요. <터미네이터 1>에서는 제가 눈을 깜빡였었어요.” 그의 말에 따르면 터미네이터가 사라 코너를 찾아가 그녀에게 총을 쏘는 장면을 아주 잘 보면 눈 깜빡이는 게 보일 거란다. “<터미네이터 2>를 찍을 때 카메론 감독에게 당당하게 말했지요. ‘이번에는 절대 실수 안 할 겁니다. 절대 눈을 깜빡이지 않을 것이니까 두고보세요’라고 말입니다.”
열정이 빚어낸 레전드의 탄생
오리온 픽처스Orion Pictures 대표였던 마이크 메다보이Mike Medavoy는 카일 리스Kyle Reese 역으로 슈워제네거를 생각하고 있었다. 카일 리스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과거로 날아와 사라 코너를 구하게 된다.
그리고 터미네이터 역으로는 미식축구 선수 O.J. 심슨Simpson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슈퍼스타인 그가 냉정하게 사람을 죽이는 살인 기계 역할을 한다는 것이 도저히 상상이 안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시나리오를 읽은 슈워제네거는 터미네이터 역할에 확 꽂혔다. 그래도 먼저 들어온 건 리스 역할이니 일단 마음은 잠시 가라앉히고 카메론 감독을 만났지만, 이 무자비한 기계에 관한 관심을 없앨 수 없었다. 터미네이터가 보지 않고도 어떻게 총알을 장전하고 분해하는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도 어떻게 사람을 무자비하게 죽일 수 있는지 그가 읽고 느낀 터미네이터를 말하느라 하루가 꼬박 갔다.
“터미네이터는 기계예요. 그러니 감정 표현은 절대 없어야 하죠. 기쁨이나 즐거움도, 성취감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어요. 그저 임무를 받고 수행하는 게 끝인 겁니다. 제가 느꼈던 이 부분을 말했어요. 그랬더니 제임스가 그러더라고요. 직접 시나리오를 쓴 나보다 더 이렇게 분석을 잘하다니. 당신이 그냥 터미네이터 해야겠네요.”
슈워제네거는 처음에 대사가 27개밖에 안된다며 거절했단다. 그래도 결국에는 제의를 받아들였고, 카일 리스 역할은 마이클 빈Michael Biehn에게 넘어갔다. 그리고 나머지는 당신도 잘 알지 않나. T-800을 연기하겠다는 그의 결심이 뭐랄까. 경험이 거의 없는 주인공이 본인의 한계를 깨닫고 더 복잡한 역할 대신 그냥 좀 쉬운 역할을 한 거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당신도 그의 연기를 봤을 것이다.
“I will be back”, 그 대사를 다른 사람이 한다? 전혀 상상이 안 간다. 해밀턴은 슈워제네거 연기를 “전혀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연기였어요”라고 칭찬했다.
“다양한 역할을 맡으며 이렇게 오랫동안 승승장구한 거 보면 정말 대단해요. 솔직히 이 정도까지일 줄은 몰랐어요.” 아이러니하게도 슈워제네거는 터미네이터의 인간미 없는 모습이 오히려 관객들을 사로잡은 무기였다고 말한다.
“터미네이터 캐릭터는 정말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인간들이 할 수 없는 모든 걸 할 수 있었거든요. 경찰한테 열 받을 때 경찰서를 통째로 날려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다들 하잖아요. 영화 개봉 전에 경찰관들 50명을 모아놓고 사전 테스트를 해봤어요. 제가 아니, 터미네이터가 경찰서 날려버리는 장면에서 모두 큰소리로 박수를 치더라고요. 기계니까 그렇게 웃지, 사람이었으면 그랬겠어요.” 이때 페이스타임FaceTime 전화가 걸려온다. 아널드는 영상통화를 아주 즐긴다.
“이제 집에 가려고.” 아이패드에 대고 말한다. “이분이 방금 약속했어. 이게 마지막 질문이라고. 벌써 16번 넘게 같은 말을 하고 있긴 하지만, 아무튼 이제 진짜 질문 하나만 하면 끝나.” “그래 알았어. 당신 기다리고 있어.”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응. 이따 봐.” 사실 질문이 하나 더 있었다. 아널드는 로스앤젤레스 슈라인 오디토리엄에서 1983년 9월 16일 정식으로 미국 시민권을 땄다. 이 오디토리엄은 2000년대 초부터 아카데미 시상식이 개최되는 유서 깊은 곳으로, 이날 2,000명이 시민권을 취득했다.
판사 앞에서 선서를 하며 웃는 사진부터 양복 재킷 주머니에 미국 국기를 꽂고 지금의 아내인 마리아 슈라이버Maria Shriver와 함께 웃으며 찍은 사진은 꽤 유명하다. 사진 속 아널드는 그 어떤 누구보다 행복해 보인다.
이런 경험이 앞으로도 가능한 건지, 아니면 미래에 대한 큰 포부를 안고 미국을 찾는 제2의 아널드가 될 수 있는 기회의 창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 본인은 원하는 걸 다 이루었으니 더이상 관심사가 아닌 것인지 구체적으로 물어봤다.
“체육관에서 자주 만나요. 오스트리아, 이스라엘, 프랑스, 독일, 러시아에서 온 사람 등 출신지가 아주 다양해요. 미국에 오는 사람들은 본인들만의 방법을 찾아요. 외국인으로서 이 땅에서 살아남으려면 본인만의 직업 윤리가 있어야 합니다. 바닥에서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죠. 그럴 필요가 없었다면 왜 굳이 본인 나라를 떠났겠어요. 꽃길만 가득한 인생, 장밋빛 인생을 버리고 누가 이 힘든 길을 걸으려 했겠어요.”
이젠 진짜 가야 한단다. 아침부터 타고 달리던 자전거는 자동차 트렁크 뒤에 실었다. 아널드가 갈 준비를 하는 동안 나머지는 호텔 앞에 있는 커다란 나무를 살펴보고 있었다. 큰잎고무나무로, 이 나무는 140년 전 오스트레일리아 선원이 술값 대신 어린 묘목을 지불하면서 미국에 들어오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갑자기 아널드가 한 마디 한다.
“제일 짜증나는 게 뭔지 알아요? 우리가 다 죽고 없어져도 이 나무는 여기서 항상 이렇게 웃으면서 있을 거라는 거예요.” 유콘에 올라타 차 문을 쾅 닫는 그다. 마지막에 웃는 건 나무가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걸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그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