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 Mobile Menu

(주)메커니즘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대로 44길 25 지성빌딩 3층 (우)04382   사업자등록번호 450-87-00813   대표 백승관
Tel. 02-794-5007   Fax. 02-794-5006   vips@makernism.co.kr

Operated by Makernism Co. Ltd. by Permission of Hearst Communications, Inc., New York, New York, United States of America

Close Mobile Menu
Scroll Down
Scroll Down
Go to top

도전이 없으면 변화도 없다

어제와 다른 선택은 오늘의 성장하는 나를 만든다. 가 만난 다섯 사람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도 도전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들의 이야기에서 힌트를 얻어 진취적인 내일의 나를 맞이해보라.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부딪히는 5인

일생일대의 순간은 한 번에 찾아오지 않는다. 어제와 오늘이 켜켜이 쌓여 마침내 큰 산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갑자기 잘되는 일은 없다. 우연히 잘 풀렸을지라도 과거의 내가 호의를 베풀고 노력해왔기 때문에 만들어진 결과다. 가 만난 5명의 인물도 이러한 사람들이다. 인생은 한 방이라는 말에 휩쓸리지 않고, 원하는 결과를 얻기까지 시도를 멈추지 않는 사람들. 이들은 어제보다 성장하기 위해 두려움에 맞서고, 열정으로 다시 해낼 수 있다고 믿으며, 열린 마음으로 불가능이란 없다고 웃어넘긴다.

두려움을 부수는 ‘대담함’

여행가&작가, 손미나

타고난 대범한 성격은 손미나를 아나운서에서 여행가이자 작가의 길로 이끌었다. 그녀는 결과와 상관없이 가슴 뛰는 일을 향해 간다. 그래서 KBS 아나운서를 벗어던지고 스페인으로 훌쩍 떠났다. 어디든 발길이 닿는 곳에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는 손미나는 오늘날 진정한 여행자다.

처음으로 혼자 떠난 곳은 어디인가? 학창 시절 잠시 스페인 마드리드에 살았어요. 언어도 왕초보 수준에 연고도 없었고요. 학생이라 돈도 없을 때인데 무슨 용기로 갔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제 자신도 놀라워요. 다행히 무섭지는 않았어요. 경험이 적던 어린 나이라 무엇을 하든 두려움이 덜했던 것 같아요.
당시 마주한 가장 큰 장벽은 무엇이었는가? 문화였어요. 다른 언어권 친구들과의 시간은 매 순간 예측 불허였어요. 같은 상황이라도 대처하는 방법이나 관점이 달랐거든요. 한시라도 빨리 한국에 돌아가고 싶었어요. 하지만 첫 도전 앞에서 포기할 수 없었죠.
그럼에도 떠나는 이유가 궁금하다. ‘그럼에도’가 아니라 ‘바로 그런 이유로’ 여행을 떠나는 것 같아요. 사고의 폭을 넓히고 성장하려고요. 나와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을 만나야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 발전할 수 있어요. 최근에 친구네 집에 초대받아 저녁을 먹다가 낯선 이들과 열띤 대화를 나누었어요. 철학적인 주제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토론이 벌어졌죠. 그날 집으로 돌아가면서 ‘성장했다’고 느꼈어요.
지금의 손미나를 만든 멘토가 있다면? 멋진 멘토가 주변에 참 많아요. 그중에서도 아버지의 지혜로움과 한없이 넓고 자유로운 사고방식, 어머니의 무한한 사랑과 용기, 아리아나 허핑턴의 카리스마와 리더십은 정말 닮고 싶습니다.
망설임의 순간, 자신에게 어떤 말을 건네는가? ‘20년 후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조언을 한다면 뭐라고 할까?’라고 물어요. 그렇게 생각해보면 답이 명확해져요. 실패에 대한 걱정은 접어두세요.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면 되고, 처음부터 걷거나 다른 길을 선택해 나가면 됩니다.
20년 후의 손미나는 어떤 모습일까?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열정과 호기심을 잃고 싶지 않아요. 80세가 넘어서도 사소한 일에 깔깔 웃으며 마음 설레어하는 할머니가 되고 싶어요.
꿈을 잊고 사는 사람들에게. 꿈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다시 말해 적극적으로 찾지 않으면 잊혀지기 쉽죠. 꿈을 수동적으로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닌지 한 번쯤 반문해보세요. 반드시 꿈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꿈은 버거운 현실을 헤쳐 나아갈 버팀목이 되어줄 거예요.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믿음’

팝페라 가수, 문지훈

2018 평창 동계 패럴림픽 VIP 주재 개회식과 피날레를 장식한 문지훈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팝페라 가수이다. 시각장애가 있는데도 결코 인생을 좌절하지 않았다. 음악에서 희망을 얻은 그는 맑고 고운 목소리로 사람들에게 그 에너지와 감동을 전하는 중이다.

원래 팝페라 가수가 꿈이었는지? 어릴 적 꿈은 축구 선수였어요. 볼보이로 시작해 3시간 정도 자면서 기본기를 연습했던 기억이 나네요. 촉망받는 선수로 인정받을 때쯤 무리한 나머지 꼬리뼈가 닳아 더이상 운동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몇 년간 많이 방황했어요.
도중에 시력을 잃었다고 들었다. 이후 모든 순간은 좌절의 연속이었어요.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쳐 기억을 잃은 적도 있고, 동네 깡패들에게 맞아 턱이 깨진 적도 있어요. 그러던 중 군대에 가기 위해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시각장애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큰 충격에 빠졌죠. 그때 저를 일으켜 준 것이 음악입니다. 독학으로 배워 처음 낸 소리를 아직도 기억해요.
이 길에 확신이 있었는가? 확신은 없었지만 믿음은 있었어요. 본격적으로 음악을 시작하고 미국 뉴욕에서 있었던 일인데요. 지하철에서 공연하던 중 누군가 다가왔어요. 그 사람이 제 노래를 듣고 신이 내려준 천사의 목소리라고, 자기를 살렸다고 많은 사람 앞에서 울부짖는 거예요. 그때 깨달았죠. ‘나는 음악을 해야만 하는 사람이구나.’ 이후 모 방송 프로그램에서 난청이 있는 사람이 제 목소리가 들리는 걸 직접 목격하고 나서 팝페라 가수라는 길에 확신이 들었습니다. 17년이 걸렸네요.
좌절 후에도 일어서는 동력은 무엇인가? 저는 남의 이야기보다 제 울림에 집중해요. 자신을 알아갈수록 목표가 확고해지고 뚜렷해지거든요. 그게 정답이라고 믿고 나아가야죠. 목적지가 정해지면 어떻게든 이르려는 마음가짐이 오늘날 제가 살아가는 힘이에요.
음악은 문지훈에게 어떤 의미인가? 숨을 쉴 수 있는 쉼터이자 저로서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예요. 다시 도전할 기회와 용기를 준 친구 같은 존재입니다. 앞으로 사람들에게 희망을 나누는 꿈을 확대하고 싶습니다. 확장되면 될수록 희망이라는 그 의미는 커지고 깊어지니까요.
준비 중인 도전이 있다면? 팝페라 음악이 아닌 대중가요로 도전해요. 스타일을 바꾸기가 버거웠으나, 현재 문경민이라는 이름으로 남성 2인조 보컬 그룹 ‘엔버드’로 활동 중이에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하는 유일한 남성 그룹이 아닐까 생각하는데요. 그룹 엔버드를 통해 부조합 속에서 화합이라는 메시지를 어떻게 만들어 가는지 사람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조만간 공개되는 첫 앨범을 기대해주세요.

추진력에 불을 지피는 ‘열정’

칼 라거펠트 수석 디자이너, 김훈

김훈은 세계적인 패션 브랜드를 거친 한국인 수석 디자이너이다. 미국 타미힐피거, 폴로 랄프로렌을 거쳐 현재는 칼 라거펠트에 안착했다. 올해로 56세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그는 암스테르담과 파리, 서울을 오고가며 세계 각국 브랜드의 디자인에 참여하고 있다.

경쟁이 치열한 패션계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고루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열심히 했습니다. 남들이 1~2장 스케치하면 저는 30장, 40장씩 끊임없이 그렸습니다. 잘 보이기 위해서는 아니었습니다. 계속 그리다 보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겨나고 점점 더 완숙한 디자인이 나왔습니다. 열심히 하고 좋은 결과를 보이니 주변에서 관심과 존중을 보이더군요. 가끔 오른손 중지에 박힌 굳은살을 만지면서 참 많이도 그렸구나 혼잣말하기도 합니다.
도중에 포기하고 싶지 않았는지? 다행히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제가 정말 좋아하고 재미있었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변화무쌍한 분야가 패션이라 지겹지 않고 항상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지금도 디자인할 때 직접 손으로 스케치합니다. 칼 라거펠트도 본인이 모든 디자인을 직접 그린다면서 처음 만났을 때 제 스케치를 보고 좋은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칼 라거펠트는 김훈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칼은 외면에서 풍기는 차갑고 근엄한 느낌과 달리 위트 넘치고 다정다감한 분이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일찍 돌아가셨지만 그분이 남긴 아카이브는 끝이 없을 정도입니다. 이를 많은 분들과 공유하고자 매 시즌 디자인하기 전 칼의 아카이브에 방문합니다.
디자인할 때 어디에서 영감을 얻는가? 미국의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의 디자인 철학은 아직도 저에게 많은 영감을 줍니다. 그가 설계한 애리조나주의 탤리에신 웨스트Taliesin West를 방문했을 때 친환경적이며 과학적인 디자인을 보고 크게 감명받았습니다.
앞으로의 목표는? 제가 보고 습득한 것을 후배들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꼭 한국의 전통 창을 배우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꿈을 꾸십시오.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면 또 다른 꿈을 꾸십시오. 그리고 남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십시오.

통념을 경계하기 위한 ‘열린 사고’

계량경제학자, 한석진

한석진은 2018년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서 진행하는 ‘모의 화성 탐사(HISEAS)’ 프로젝트의 대장으로 선발되었다. 이는 한국과 아시아를 통틀어 최초이다. 그는 일반적인 통념이나 무의식적인 생각에 자신을 가두지 않았기에 우주여행이라는 꿈에 가까워질 수 있었다.

평소에 우주에 관심이 많았는지? 민간인이 살지 않는 섬에서 우주복을 입고 선외 활동을 하는 모의 화성 탐사 프로젝트는 저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제 꿈이 훗날 우주여행을 하는 것이에요. 인종, 나이, 성별, 직업 등 어떤 표식을 붙여 스스로를 가두려 했다면 애초에 지원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선발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었는가? 가장 어려웠던 것은 당시 근무하던 텍사스 대학교에서 1년간 떠나 있을 여건을 마련하는 일이었어요. 외국인 신분이라 취업비자가 문제였던 거죠. 좌절하고 있던 차에 제가 찾아갔던 인사과장이 50대의 동양계 여성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렸어요. 그래서 그녀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습니다.
어떤 내용의 편지를 썼는가? 텍사스는 미국에서도 백인 비율이 높아요. 그녀가 이곳에서 인사과의 수장이 되기까지 동양인 여성으로서 겪었을 좌절에 대해 생각해봤어요. 그 도전의 결실이 감동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저도 동양인으로서 비슷한 도전을 해보고 싶다고 썼어요. 지난 5년간 모의 화성 프로젝트에서 배출한 대원들 중 동양인은 한 명도 없었거든요.
답장이 왔는지? 며칠 후에 답이 왔어요. 학교 변호사를 고용해서 어떻게든 해결 방법을 찾아보겠다고요. 그렇게 해서 극적으로 미션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의 화성 기지에 들어간 순간 기분은? 문이 닫힌 순간부터 외로움이 밀려왔어요. 지구와의 교신이 실제처럼 20분의 시차를 두고 이루어져서 그 고립감이 더욱 실감났던 것 같아요. 식사는 건조된 식재료를 물에 불려야 했어요. 요리도 힘들고 맛도 상상 이상입니다.
프로젝트에 도움된 경험이 있다면? 아무래도 군대 경험이지 않을까 예측해봅니다. HI-SEAS는 극한 환경에서 미션을 수행할 때 발생하는 문제와 해결책을 알아보는 것이 목적입니다. 강원도에서 육군 병장으로 제대했는데, 우주비행사가 꿈이어서 극한 경험을 찾아다닌 대원들에 비해 제 경험이 가볍지 않더라고요. 자부심이 느껴졌습니다.
이때의 도전은 어떤 기억으로 남았는가? 예상보다 일찍 끝나버린 모의 화성 프로젝트였지만, 돌이켜보면 언제라도 중단될 위험 요소가 많았어요. 결국 저는 좌절할 수밖에 없던 일에 도전한 거죠. 그걸 깨닫고 제 자신에게 물었어요. ‘이렇게 쉽게 무너질 일에 나는 여전히 도전하고 싶은가’, 대답은 ‘그렇다’예요. 시도와 실패가 이어질 때 죽지 않고 살아 있다고 느끼는 것 같아요.

지혜롭게 돌파하기 위한 ‘유쾌함’

픽셀 아티스트, 주재범

화면상의 작은 점으로 그림을 그리는 주재범은 국내에서 저명한 픽셀 아티스트이다. 세계적인 기업인 구글과 나이키, 크리스찬 디올 등과 협업한 그는 최근 NFT 시장에 진출하여 예기치 못한 시도를 보여주었다.

픽셀의 어떤 매력을 좋아하나? 네모진 단순함에서 오는 귀여움입니다. 일도 스스로에게 자신 없던 시기가 있었어요. 그때 기분 전환 겸 제 모습을 다방면으로 그려보면서 새로운 일들을 많이 벌였어요. 픽셀 아트도 그중 하나였고요.
<모나 바이러스>가 NFT 시장에서 최고가로 팔렸다. 2021년은 새로운 시스템 NFT의 유행으로 작가와 작품의 의미를 고민하기 시작한 해였어요. 와중에 누군가 2012년 제가 제작했던 를 무단 도용하여 NFT로 어마한 판매고를 올린 사건이 일어났고요. 큰 충격을 받고 도용당한 작품을 역이용해 만든 작품이 입니다.
도용당한 작품을 역이용한 것인가? 무단 도용당한 저의 작품은 이미 팔려나갔고 주변 작가, 법조인의 자문 결과 국제적인 법적 대응이 쉽지 않다고 판단했어요. 그래서 다른 방법으로 반격한 것이 바로 패러디입니다.
대처가 슬기로운 것 같다. 유쾌하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는 문제를 혼자 정면 돌파하는 타입이 아니에요.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가장 좋은 해결법을 찾으려 노력하는 편입니다. 제 주위에 저의 실없는 소리를 잘 받아주고 피드백도 곧잘 해주는 친구들이 있어요. 나와 다른, 다양한 성향의 사람들과 어울릴 때 영감이 가장 잘 떠오른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시도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는지? 그동안 크고 작은 성공과 실패를 해왔습니다. 그럼에도 계속 새로운 도전을 함으로써 지난 과오에 침식되지 않는 힘을 기르는 것 같아요.
꿈을 잊고 사는 사람들에게 한 마디. 꿈이 없어도 매일매일 웃을 일이 잔뜩 있다면 언젠가 꿈을 찾는 시기도 분명 오겠지요. 지금 생각나는 말이 있어요.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만 울게 될 것이다.’